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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야지

V3 SK) 김성근 감독_ 이순신 장군님과 같은 모습 4. 자신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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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 감기는 안걸리셨나요?
    역시 가을은 1~2주 만에 휘익 사라지고, 겨울이 오나봅니다.
    가을이 더 짧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더운 여름 후에 찾아온 아주 좋은 날씨가
    떠나가는게 아쉬워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오늘은 김성근 감독님과 이순신 장군님을 비교하는 4번째 시간을 갖어보려 합니다.





- 제목은 항상 김성근 감독님과 이순신 장군의 비교이지만 계속해서 제갈공명의 이야기도 끌어 왔습니다.
  제가 삼국지를 너무 좋아했거든요. 이것 저것 다 합쳐서 삼국지만 20번 넘게 읽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제갈공명보다 이순신 장군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제갈공명은 작은 나라를 크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유비의 지원 아래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유비가 왕이 되기 전, 그리고 촉(蜀)나라의 승상이 되고 나서도 제갈공명은 자신이 무언가를 추진 할 때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했습니다. 대기업의 Brain이 돈걱정 없이 아이디어만 내는 상황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정 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전라좌수사 시절부터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님은 오직 자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도 받고, 왕과 조정의 비난도 사게 되었죠. 
  결국은 장군이 전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을 하셨습니다.

  전쟁 전, 왜의 동태가 이상함을 파악하고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보강하려고 하였습니다.
  육전에 강한 왜군을  바다에서 승부를 띄워 아예 조선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는 모든 이들의 반대를 샀습니다. 섬나라인 왜군을 우리가 수군으로 이길 수 있겠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끝까지 거북선을 만드셨고, 수군을 강성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의 수군은 7년 전쟁간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지요.

  조정 대신들이 전세가 조금 유리하다 싶어 다른 지역을 공격을 하라고 할 때에도, 
  이순신 장군은 때가 아니면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의 명을 어기는 이 충무공이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였겠지요.

  장수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충무공은 자신들의 군사중에서, 시험을 치뤄 무관을 직접 뽑기도 하였습니다.
  사농공상의 구분이 확실한 조선시대에.. 그것도 왕이 있는데 무관을 직접 뽑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충무공 께서는 조선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이 욕을 먹는 것을 감수하였습니다.

  오직 승리를 위하여 이순신 장군님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 얍삽한 야구
- 반칙야구
- 선수 생각은 안하고 승리만 생각하는 감독
- 프렌차이즈 선수를 키우지 않는 감독

모두 김성근 감독을 욕하는 말들입니다. 김성근 감독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길을 고수하셨습니다.
승리를 향한 열망이었죠. 그래서인지 더욱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2002년, LG 감독 시절엔 그 절정에 다가섰죠.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어 낸 뒤, LG구단으로부터 해임통보를 받게 되지요.
마치 전승 중인 수군통제사께서 옥살이를 하게 된 것 처럼요.

하지만 백의종군 하여 명량해전을 치르신 이순신 장군처럼,
김성근 감독님도 훗날 SK로 부임하여 4년간 3번의 우승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선발투수가 150개~180개 정도는 공을 기본적으로 던지던 시절, 마무리 전문 투수를 한국에 정착시키는 것도,
투수 진이 강하지 않은 팀에서는 선발의 의미가 아닌, 단순 첫번째 투수로 사용하여 벌떼 야구를 하는 것도,
선발 타자 전원이 도루를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모두 욕을 먹으면서도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방법을 고수하셨고, 2000년대 후반의 SK왕조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가 No라고 할 때, 자신의 신념을 믿고 끝까지 Yes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두 분은
충분이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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