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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야지

[데미안]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줄거리와 독후감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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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펜디에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버린 탓에, 읽지 못했던 책을 집어들었어요. 바로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작품입니다. 

 

 


 
 
스토리
스토리는 싱클레어라는 부유한 집한의 자제가 10살 남짓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따뜻한 가족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는데요.  같은 학급에 소위 말하면 일진 같은 아이가 있고, 싱클레어는 걔에게 쫄보처럼 보이기 싫어서 사과를 도둑질한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일진이는" 진짜야? 니가 그걸했다고?" 하며 급 태세전환해서 "내가 그 사과 도둑질당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너를 경찰에 신고하기전에 돈좀 바쳐봐~" 를 시전합니다. 그날로부터 싱클레어는 하지도 않은 도둑질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바치는 생활을 합니다. (학폭 멈춰!) 그렇게 싱클레어는 갑자기 행복하던 일상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게 되었고, 가족들의 행복, 안정감과 자신은 동떨어져있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죠. 
 
 
그무렵 학교에 데미안 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전학생이 옵니다. 묘하게 데미안에게서 싱클레어는 그맘때의 아이들 같지 않은 어른스러움, 성숙함,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데미안도 싱클레어와 맘이 통했는지, 둘은 몇번 얘기를 나누게 되죠. 어느날 하고길에 일진에게 뜯기고 있는 싱클레어를 뒤에서 지켜본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두려움은 너가 그를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란 어려운 이야기를 턱! 건네주고 자기가 해결해주겠단 듯이 얘기하고 사라집니다. 그날로부터 데미안이 어떻게 한 건진 모르지만, 일진이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죠. 
 
이후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더욱 가까워져서 데미안이 이야기 하는 것들을 귀담아 듣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꼈던 원인, 이유에 대해서 데미안의 이야기들을 통해 세상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교육되어진 절반이며, 나머지 절반은 터부화 된 것이거나, 안하는게 좋다고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는 수업 주제였던 성경 속 가인과 아벨이 실제로는 가인이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흘립니다. 그리고 가인이 자신의 이마에 표식을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 라는 말에서 표식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깨어있는 자이며, 깨어나가는 자라는 이야길 합니다. 
 
 
싱클레어는 신실한 아버지, 어머니가 모르고 있는 것들은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끼다가, 내가 인식해왔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부질없게 느끼며, 성장해 나갑니다. 데미안과는 멀어져서 싱클레어는 기숙학교 같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싱클레어는 염세주의자처럼 인생의 한철, 찰나라며 이전에 행복하고 아무것도 모르는채 신실하던 삶과는 동떨어져 살게되죠. 퇴학을 당하기 직전까지 갈만큼 방만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어떤 여자를 보고 마음에 큰 울림을 갖게 됩니다. 물론 접근은 하지 않아요. 다만 마음에 품고, 그녀가 주는 인생의 충만함을 간직하고 느끼며, 그림으로 그녀를 그리려고 합니다. 
 
싱클레어가 그린 것은 남자도, 여자도, 젊지도,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모호한 얼굴이였습니다. 바라보다가 싱클레어는 그것이 데미안의 얼굴과 비슷하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데미안이 줬던 가르침, 깨달음을 스스로 되새김질하며 방만한 생활을 탈출! 그리고 다시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길을 지나던 싱클레어는 교회의 한 오르간 연주를 듣게 되고, 그 연주곡들은 하나의 뚜렷한 방향을 담고 있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당시 싱클레어는 매일 고뇌와 고민에 사로잡혀 수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다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를 그리게 됩니다. 그 새를 바라보던 싱클레어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 하던 진리라던 사실을 깨닫고 데미안에게 이름도 안적은채, 그림을 보냅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생활하며 스스로의 삶을 계속 시험합니다. 그는 오르간 연주가 가르키는 방향이 궁금해졌고, 연주가 끝나길 기다린 다음 미행해서, 연주자가 간 술집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술집에서 그 연주자 앞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스스로 깨달아왔던 세상이 사실을 규정된 절반이였으며, 자신은 그 반대가 있단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신의 이름을 얘기하죠. 아브락사스.  그 당시는 종교적인 색채가 뚜렷한 시대였기에, 다른 종파를 믿는 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르간 연주자는 쉿- 을 날리며, 자리를 옮겨서 더 얘기하지. 이러고 그를 그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집에서 불멍을 때리며 철학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오르간 연주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유명한 신부이며, 자신도 이전에 신학과정을 밟았지만, 싱클레어처럼 인생의 반대편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길이 신학자의 길을 가는 것은 맞지만, 이 신학은 아니다. 라는 생각에 아브락사스 신을 공부하고 예배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 둘은 철학을 공부하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주로 오르간 연주자가 알려주는 역할이였죠. 그러던 어느날 똑똑한 싱클레어는 통달해버린 것인지... 오르간 연주자의 한계를 간파해버리고 그에게 악의는 없지만, 필터링 되지 않은 핵심을 팩트로 찔러버립니다. 오르간 연주자는 자신의 한계를 통찰한 싱클레어에게 마음의 상처를 좀 받았지만 인정해버리죠. 그리고 그날로 싱클레어는 다시 혼자서 길을 갑니다.
 
이후 자신이 그린 그림과 똑 닮은 한 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죠.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놀랍게 데미안과 만나게 됩니다! 뚝딱!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둘은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죠. 이제까지 있던 일들을 데미안에게 털어놓고, 데미안은 기뻐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어머니와 만납니다. 어머니도 데미안처럼 깨어있는 사람이였고, 어머니는 싱클레어의 잠재력, 그리고 표식을 알아보고 본인을 편하게 부르라고 환대해줍니다. 데미안이 어렸을 적 학교에서 표식이 있는 너를 발견했고, 친해질거라 얘기했다. 그리고 네가 그린 새 그림도 데미안의 집 벽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고 보여줍니다.

그날부터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지식과 깨달음을 탐미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곧 이 생활이 끝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실 방학이 끝남이였음) 이젠 보지 못한다는 슬픔에 사로잡혀있었는데, 갑자기 데미안이 자신의 집앞으로 온 것을 발견합니다. 데미안은 그에게 전쟁이 터졌고 자신도 출전해야한다며 이제 보지 못함을 넌지시 건넵니다. 그렇게 둘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어느날 포탄이 떨어져 싱클레어는 정신을 잃었고, 막사에 누워 몽롱하게 정신이 들자 자신의 옆에 데미안이 있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앞으로 나는 네가 오라고 할때 쉽게 오지 못할거야. 그럼에도 너는 네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네가 필요하면 언제든 네 안에 나를 불러.“ 이말과 함께 아침에 눈을 딴 싱클레어의 곁엔 다른 사람이 누워있다.


 
감상 일지

싱클레어처럼 사람들은 어릴적 사소한 거짓말, 나쁜 행동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르는 행위로 심장이 덜컥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짤짤이 동전들을 모아두던 저금통에서 500원을 꺼냈을때가 생각난다. 내 어린 시절 속 선악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보지 않았고, 스스로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책임져본 적 없던 시절, 이전엔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금기에 대한 첫번째 도전이 아니였을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금통의 작은 입구가 벌어져 돈을 빼낸 티가 남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나도 한때 그 사실을 들킬까봐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단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이전까지 어렸던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부모의 자식이라고 스스로 인식해왔지만, 떨어져나오는 과정, 금기를 깨는 과정을 겪으며 스스로를 가족과 분리하고 소속이란 개념에 대해 인지했던 순간이였다. 이 경험이 양심에 대해 인지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양심은 이미 500원을 꺼내던 순간 내던져버렸고, 지금은 그 선택을 한 나를 어떻게 보고 정의할 것인가를 인지하는 개념이다. 

 

시민 수준이 높다고 간주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아온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고 나 스스로 투명하고, 공정하고, 깨끗하게 살아하는 삶을 바라면서도, 자주 사람은 참~ 간사해~ 라고 쉽게 카드를 뒤집듯 이상을 져버린다. 투명성을 갖추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단 방향을 택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저렇게 굳이 살아야하는데? 나는 왜 지금 열심히 살고 싶을까? 왜 남들을 등쳐먹으면 안되는걸까? 남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자주 생각해보게 된다. 왜 저 인간을 밟으면 안될까? 이 현실을 나 혼자만 사는게 아니니까, 사회화의 측면에서 제약을 거는 측면이 더 있기는 하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깨어있으라는 소리다. 시대 사상의 주입, 교육의 가르침에 정말 이것이 맞는가? 회사에서 나에게 주입하는 업무 태도,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치들에 대해서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것인가? 아닌가? 마치 데미안은 메타인지다. (헤르만헤세가 메타인지를 알았을까?! 천재 인정.) 그리고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한 답을 탐구하고 고민하라는 연장선까지를 제시한다. 알에서 깨고 나오려는 새처럼.

 

한편으로 싱클레어는 정말 잘자란, 스스로 성자같은 늬앙스의 사람으로 발전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데미안은 영화 배트맨속 조커같은 빌런형이 성장하게 되는 생각의 발판이 바로 이 구조가 아닐까 싶었다. 사람을 그릇에 비교하고 담을 수 있는가. 담을 수 없는가를 논한다. 담지 못하면 깨지나? 깨지진 않는다. 다만 흘러넘쳐서 재대로 쓰지 못할 뿐. 그릇이 찌그러지게 생겼는데, 물을 정원의 형태로 담을 수 있나? 없다. 그릇의 형태 = 본인의 성향을 뛰어넘기란 인간이 가능한 일인가? 이건 의도치 않게 스탯을 잘못 찍은 메이플스토리 캐릭터처럼 조금씩 뭔가 일그러진, 모호한, 엉뚱한 캐릭터들이 되는데,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조커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 계층 격차, 나는 공정함을 원해! 라고 외치는 조커는 비뚤어진 데미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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